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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의 추억

 
2016.12.26 17:47  

 

조카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일찍 동네에 있는 이발소에 갔다. 동생 아들이 결혼식을 하는 날이기에 큰아버지로서 단정한 모습으로 식장에 가기 위해서다.
 
내 딸, 아들은 모두 결혼했으니, 조카의 결혼식이 무척 반갑기 그지없다. 설 명절에도 이날을 위하여 이발을 미루었다. 이발소에 당도하니, 70세가 넘은 듯 보이는 이발사가 청소하고 있었다.
 
방금 문을 열었나 보다. 얼마 전부터 단골로 다니고 있기에 이발사도 나를 안다.
”오늘 잔칫집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왔어요.“
잘 알겠다며 내게 흰 가운을 둘러주더니 세심하게 머리카락을 잘라 나간다. 가위질 소리에 선잠이 든 가운데 아련하게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다.
 
 
이발의-추억.jpg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동네에는 이발소가 없었다. 그만큼 시골이었다. 동네에는 6·25 동란 후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수용소’라는 곳이 있었다. 여기에 이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이발을 하러 가면 작은 원형 의자에 앉혀 놓고 바리캉으로 머리털을 밀어 댔다. 바리캉은 이 기계를 만든 프랑스회사가 ‘바리캉 마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잘 들지도 않는 바리캉이 머리 위에서 움직여나가면 머리카락을 뜯어내는 것처럼 너무 많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이발사는 그러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너 머리 언제 감았어? 머리에 쇠똥 따지 켜켜이 붙어 있네”라며 핀잔을 주었다.
 
이발할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곤 했기에 이발하러 갈 때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머리를 감곤 했었다. 그래도 그 소리는 항상 나왔다. 이발 요금은 얼마였는지, 무상이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쇠똥은 머리를 감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옆에 있는 이발소에는 늘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곤 했었다. 여기에 들어서면 머리 모양은 ‘상고머리’와 ‘빡빡머리’ 두 가지 중에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항상 ‘빡빡머리’를 깎았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우리 동네에도 이발소가 생겼다. 이발소의 이름은 “가보게 이발관”이었다. 상호를 왜 그렇게 하였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 당시에 시골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모일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이발관이 동네 사랑방이 되곤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았다. 사무실에 출근하는 어엿한 직장인인데 단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달에 얼마씩 돈을 주고 매일 출근길에 ‘가보게 이발관’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다녔다.
 
매일 아침 나는 이 이발소에 들러 고대기로 머리를 납작 누르고 기름도 발랐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 모양이 무슨 공작새 같기도 하고 매우 이상해 보인다.
 
예비군 훈련을 가면 복장 검사와 용모에 대해 점검을 하였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정없이 머리털이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70년대 말 수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경기도청이 소재한 큰 도시라서 이발소도 많았다. 이발소도 등급이 있었다. 머리만 잘라 주는 곳, 면도까지 해 주는 곳, 안마에다 손톱까지 잘라주는 곳도 있었다. 그때에는 이발비가 비싸지 않았다. 겉멋이 좀 들었을 때는 안마까지 해주는 곳에서 이발한 적도 있다.
 
세월이 좀 지나자 퇴폐 이발소가 등장했다. 우리 동네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꼭 불법, 부정, 퇴폐 같은 것들은 독버섯처럼 정상의 틈새에 끼어 피해의 온상이 된다.
 
요즘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발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졌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겨우 두 군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남자들도 대부분 미용실을 찾기 때문이다. 나도 두서너 번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아봤지만, 면도까지 해야 이발한 기분이 나는 나로서는 미용실과 더는 인연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발소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 대부분 노인이다. 아직은 노인들 틈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정서인데 방법이 없다.
 
이날 나는 이발과 함께 깨끗이 면도까지 했다. 거울을 보니 더부룩하던 얼굴이 깔끔하고 산뜻해 보였다. 이 정도면 조카 예식장에 가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다.
 
문득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발했을까 생각을 해보니, 1년에 10번만 잡아도 천여 번을 향해 가고 있다.
 
조카 결혼식에 가려고 좀 신경을 써서 이발하다가 보니, 머리 모양에 내 삶의 여정을 비춰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지만, 그 시절의 추억이 어린 이발소가 눈에 어른거리며 나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이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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